'원내생 일기'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1.09.04 길을 멈추고 책을 들다. '처음처럼'을 읽고
  2. 2011.05.12 특수클리닉
  3. 2011.05.05 나이를 먹긴 먹는다.
posted by d도리도리b 2011. 9. 4. 23:32


 

서해안을 따라 달리다, 석양이 지는 시화호 방조제에서 오토바이를 멈추고 걸터앉는다. 저기 바다 건너로는 송도의 비죽비죽한 마천루가 보이고, 뒤편으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간척사업이 진행 되는 곳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책을 꺼내 든다. 여행지에서 혼자 읽는 책은 일상에 파묻혀 있을 때 읽은 책에 비해 훨씬 많은 생각을 낳게 한다. 이번에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선택된 책이란 점이 맘 한구석을 찝찝하게 하지만.

편안함은 사람을 잠들게 합니다.’ 라는 글귀에 시선이 머문다. 나는 항상 편안함을 경원시 하는, 도전의식에 불타는 젊은이를 표방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를 생활의 모토로 하기에 주변인들은 내 생활을 보며 늘 다이나믹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고 내 자랑거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정말 제대로 고생을 하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생이라고 해봐야 힘들게 열심히 놀았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침, 방조제 공사현장에서 앳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파이프를 나르고 있다. 기껏 해야 스물 한 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가 돈을 벌려고 저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엄마 용돈이나 받아쓰고, 시간이 나면 이렇게 놀러 나올 궁리만 하는 내가 철부지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나도 벌써 스물다섯. 어른들 말씀처럼 옛날 같았으면 애가 셋일 나이다. 친구들 중에는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녀석들도 있고, 아예 일찍 사회로 나가 사장님 소리를 듣는 녀석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고등학생인 것만 같다. 매일 아침 억지로 학교를 가서, 어마어마한 등록금을 여관비 삼아 잠을 청하며, 시험 때 밤새는 것이 벼슬이라고 생각 하면서 하루하루 손꼽아 방학을 기다리는, 고등학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중생인가.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꺼내 본적이 있다. 한결같이 그래도 넌 2년 후면 돈 많이 벌거 아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뭐라고 반문하고 싶지만, 그네들이 보기에 나는 좋은 대학에 가서 미래가 보장된 성공한 친구이기에 더 이상 대화가 되질 않는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흘러 가다가 어느 순간 사회로 내던져 졌을 때, 내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항상 의문이 든다. 책에서성공은 지위를 크게 하고, 실패는 사람을 크게 한다.” 라는 글귀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내 인생에서 실패라 함은, 재수를 시작하면서 맛보았던 패배감 정도가 떠오른다. 그 패배감을 딛고 이를 갈았던 결과로 지금의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내 삶은 정체가 된 느낌이다. 대박이 터졌던 그해 수능 이후로 딱히 성공이랄 것도, 실패랄 것도 없이 그저 끌려가고만 있다. 이러다 그냥 졸업 하면 그저 그런 어른이 되겠지. 겁이 난다. 지난 여행에서 스친 어떤 이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어른들이 너무 존경스러워.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사람이든, 그 어른은 내가 겪었던 이런 젊은 시절의 고민과 좌절을 맛보고 해쳐 나온 사람들이잖아. 그래서 나는 어른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 멋있다!’라는 느낌과 함께, ‘존경받아야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나는 존경받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함이 남았었는데, 또다시 그를 떠 올리게 만든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 해가 져 어두컴컴하다. 다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길을 나선다. 내 앞으로 끝없이 뻗어 있는 길이 어두컴컴하다. 라이트는 고작 내 앞 몇 미터만을 비출 뿐이다. 지나는 차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이 쌩쌩 달려 나간다. 그래도 그 어두컴컴한 길을 벗어나면 나도 아늑한 숙소에 도착할 거라 생각하며 계속 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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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도리도리b 2011. 5. 12. 23:12

5살3개월 인아.
PMH : Leukemia, Bone marrow transplantation history, Chemo Tx 4회. 성장 지연으로 갑상선호르몬제제 투여 경험.

진료실 문을 들어오자마자 시키지 않아도 자기자리를 찾아 가더니 그 높은 체어를 기어 올라가서 눕는다. 앞니가 다 빠져 훤한 잇몸을 드러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선생님을 말똥말똥 올려다 보고 있다.

어린 녀석이 벌써 병원에 익숙해져 있는듯 해 마음이 좋지 않다. 곧이어 이어진 s-s crown 과, 신경치료. 마취를 하긴 했지만 아프고 무서울텐데 불평 한마디 없다.

손을 내려다 보니 의자를 부셔져라 꽉 쥐고 있다.아무말 없이 손을 잡았더니, 이미 땀범벅이다. 차분해 보이고 안정되 보이는 이 녀석도 극도로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고 자그마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세게도 쥐고 있다. 병원 문턱을 얼마나 드나들었을까, 또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 하니 코끝이 시큰거린다.

확실히 협조도가 좋으니 진료는 빨리 끝난다. 체어에서 안아다 내려 주니 금새 엄마 뒤로 숨는다.

다행히 골수이식을 받고 항암치료도 무사히 다 끝냈다고 하니, 더 이상 아플 일은 없겠지만, 부디 어릴 때 기억을 다 잊고 건강하게 자라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posted by d도리도리b 2011. 5. 5. 01:44

소아치과 로테이션 이틀째.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구치부를 S-S crown으로 수복하고 나가려던 8살 병현이. 아이 엄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얘기 한다. "저, 앞니 흔들리는데요. 집에서 뽑으려니 너무 무서워요."

이미 녀석은 자지러지려고 한다. "안 뽑을래요. 뽑으면 안되요. 진짜 아파요. 안되요. 무섭단 말이에요. 선생님 제발요. 살려 주세요. 안되요."

"알았어~ 만져 보기만 할께. 선생님이 안 뽑고 살살 흔들어 보기만 할께~"

어느 순간 앞니는 교수님 손에 들려 있었고, 녀석은 병원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울어대기 시작 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괜히 내 눈가가 축축해졌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 어릴적 기억이 떠올라서도 아니었고, 아이한테 감정 이입이 된 것도 아닌거 같은데. 그냥 그 장면이 너무 정겨웠다.
이 하나 안 뽑겠다고 바둥바둥 거리는 아이도, 동네 할아버지 처럼 아이를 데리고 얼르고 하는 무서운 교수님도, 옆에서 이 뽑는걸 못보고 눈을 가리고 있는 엄마도, 정지된 스틸컷 처럼 눈에 하나 하나 들어왔다. 

그리고 둘러 보았다. 여기 저기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나 이뻐보였다.
미쳤나보다.

5살부터 15살까지 누구든 보기만 해도 경기를 하던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
25살에 나이 타령 하려니 간지럽지만, 나이를 먹긴 먹는다.
장가갈 때 됐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