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d도리도리b 2011. 9. 20. 22:46

통진과 이틀째. 무료한 오후.
로테이션이 시작되면서 부터 이상한 환자가 밀려온다.

입에서 실같은게 나온다며 이를 다 뽑아 달라는 정신과적 병력을 가진 할아버지.
근 몇년간 이를 전혀 닦지 않은것 같은 20대 여성의 화성인.

나도 모르게 김이 빠진다.

눈은 뜨고 있되 뜨고 있지 않다.
귀는 열려있되 열려있지 않다.
손은 열중쉬어 자세로 고정되어 있고, 파티션 끄트머리에 등을 살짝 기댄 채, 다리는 스크럽 속에서 살짝 짝다리를 짚은 채, 나는 내가 찾아낸 최고로 편한 자세에 스스로 감동하며 얼른 5시 반이 되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기만을 기다린다.


mantle cell lymphoma 진단을 받아 항암치료를 받으신 아주머니였다. 그래도 별 관심 없다. 단지 병동환자를 보고 채워야 할 케이스칸에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보일듯 말듯 미소를 흘리며 파티션에 등을 다시 기댄다. 선생님과 환자가 뭔가 대화를 주고 받는다. 마치 잠결에, 벽 너머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처럼 아득하게 들려온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물끄러미 훑어 보니 항암치료가 저번주에 끝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다. '저런.. 안됐다'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 다시 혼자 망상을 펼치며 나만의 세계로 빠져 든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들려오는 단어가 '컨설트' '교수님' '무슨 요일' 정도로 바뀌어 있다. 이제 끝나고 예약을 잡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도망가는 정신줄을 잠깐 붙잡아 온다. 끝나고 나면 물컵 빼주고 자리 정리 하는 건 도와야 하기에. 환자분. 날짜를 확인 하려고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 순간 보인 핸드폰 배경화면이 쿵... 내 머리를 한대 후려 친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딸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눈 주변이 뜨겁다.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아주머니가 지금은 이렇게 병마와 싸우고 계신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쓰고, 힘겨운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계신다.

참을 수 없이 부끄럽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거지?

그리고 또 눈 주변이 뜨겁다.


글쎄, 사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그런 환자분 옆에서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꼈다는 사실에 죄스럽다. 무관심했다는 사실에 죄스럽다.

1학기, 3월. 처음 병원 로테이션을 나왔던 그 때 나는 이렇지는 않았다. 모든게 어려웠고, 모든게 신기하고, 모든게 궁금했다. 말 배우는 아이처럼 이것 저것 물어 보고, 들쑤시고 다녔다.

2학기, 9월. 모든게 지루하고, 모든게 따분하고, 모든게 짜증났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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