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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도리도리b 2013. 4. 18. 02:58

정신과적 병력이 있는 60세 여환.


나를 이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은 사람을 원망하며 예진에 들어갔다. 여느 정신병자?들 처럼 이 분의 사설도 장황하다. 하나 하나 듣고 있자니 도대체 어디가 불편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온 몸에 안 아픈 곳이 없다. 도대체 여기가 치과인지 정형외과인지 신경과인지 재활의학과인지 구분도 안된다. 


듣다 보니 치과 얘기도 나오긴 한다. 아래 앞니 아래 쪽으로 고름이 막 철철 흘러 넘치는데 아픈걸 참고 나무 젓가락으로 쥐어 짰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고름이 줄줄 새어 나오고 밥먹다 보면 밥에도 고름이 묻어 있다고 한다. 정신병자의 하소연은 들어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프루브를 갖다 대고 치주 검사를 해 본다. 역시나 멀쩡하다. 한군데 아픈 부위가 있었지만, 거길 누르면 통증이 얼굴을 거쳐서 가슴쪽으로 갔다가 무릎으로 내려 가서 한바퀴 돌아서 다시 얼굴로 올라오네 어쩌네 하면서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한다. 한숨을 푹 내쉴 무렵, 교수님이 들어 오신다. 


"티엠디 팔로업 중인 psy problem 있는 환자로 6개월 만에 내원하셨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저쩌고 이렇고. 오늘은 아래 앞니 쪽에 고름이 나온다고 하시는데, 피스츌라 없고 전치부 프루빙 뎁스 2~3mm 이내 입니다." 라고 노티 하면서 내심 '교수님. 정신병자 얘기 입니다. 교수님은 사람이 너무 좋으세요. 이런 분들 얘기 다 들어 주지 마시고 제발 정신과로 보내주세요' 라고 내 가슴이 소리 친다. 


내 괴랄한 차팅을 훑어 보신 교수님, "엑스레이 찍고 확인 합시다."


음, 굳이 그래야 할까요.

모르겠다. 일단 시키니 한다. 촬영실로 들어가 늘상 하던 얘기를 내뱉으며 엑스레이를 찍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프루빙할 때 아프다고 했던 치아 밑으로 커다랗게 염증이 잡혀 있다. 당연히 아팠겠지. 졸라 아팠을거다. 이걸 그냥 정신병자의 하소연 정도로 취급 했다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래놓고도 치과의사라고 가운자락 휘날리며 싱글거리고 있었다니. 


컨설트를 내고 보존과로 보내고 나서도 부끄러워 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무렵, 교수님이 한마디 툭 던지고 가시는 말이 내 마음을 후벼판다. "네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알겠지?"


네. 정말 잘알겠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교수님은 내 가슴이 하고 있는 말 까지 다 듣고 계셨던 것 같다.


병원에는 생각보다 정신과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다들 그런 환자를 피하고 떠넘기다 보면 교수님 혼자 그 하소연을 다 들어주곤 하신다. 그때 마다 꼭 저렇게 까지 해야 할까 라며 뒤에서 수군 거리곤 한다. 저렇게 사람이 좋아서 얘기를 다 들어 주니까 다른데로 안가고 자꾸 여기로만 몰려 온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이제 왜 그러시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들도 환자고 불편하고 아픈데가 있으니까 병원을 찾아 오는거였다. 나는 당연한 진리를 모르고 있었던 거다. 


일을 시작한지 딱 2개월째다. 그간 많은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좌절도 해보고

환자들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선물에 하루 종일 싱글벙글 하기도 하고

새벽에 찾아 오는 주취자들과 드잡이질을 하며 헐크가 되기도 했다.

의사면허와는 상관없는 잡일들을 하면서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잉크도 마르지 않은 의사면허로 처방을 내려 조금씩 호전되어 가는 환자를 보며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 하나 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기억 내지는 배움으로 내 손에, 내 머리에 새겨진다. 


인턴 나부랭이 주제에 많은 것을 새겨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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